[아버님 전상서]
돌아가신지 어언 35년이 지난 이제서야 아버님께 이런 편지를 쓰게 되었군요. 그것도 생전 처음으로... 저에게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그저 엄하다 못해 무서운 기억밖엔 없군요. 20년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자식이라 귀하게 키우면 행여 버릇없는 나쁜 자식이 될까봐 걱정되어서 일까? 아님 평소에 아버님의 훈계처럼 '귀한자식 매를 주고 미운자식 밥을 준다'는 생각에서 일까? 저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빈소에 걸린 사진마저 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정도로 아버님은 그냥 무서움의 대상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당신께서 돌아가신 후 주변의 모든 분들의 한결같은 평가가,지극한 효자 내지는 이름난 호인이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할아버지)에 그렇게 효자이셨고 또 주변분 들에게 그렇게 호인이셨던 분이,당신에게 그렇게 귀하고 이뻤을 자식에게만은 왜 그리도 냉정하고 엄하기만 하셨는지? 제가 그 해답을 찾는데 에는 무려 30년의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속으로 너무도 사랑하시면서 그걸 내색하지 못했던 그 아픔을 이해하는 데에 말입니다. 그것도 어느 날 문득 제 아들에게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로 비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순 없었는지? 그랬으면 훨씬 더 자신감있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었을 텐데..하는 물음을 이제 제 자신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아버지를 생각하며 함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있던 그 고향 들판을 생각합니다. 속이 좋지 않으셔서 여름날이면 손수 이른 새벽에 들판에 나가서 쑥잎을 뜯어 와서 즙을 내어 드시던 모습이며,힘든 농사일을 내색 않으시고 하시던 모습하며,가을이면 손수 농사 지으신 고추등을 내다 파시고 생선이랑 반찬을 사 오시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천성이었든 아님 환경으로 인한 것이었든 그렇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던 저의 성격도 이제는 많이 바뀌어서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면서 저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어쩌면 그렇게 저의 어릴적 모습과 꼭 빼 닮았는지 속이 다 상하는군요. 그게 다 제 탓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이의 의견을 묻지 않고 항상 '이렇게 해라,저렇게 해라' 일방적이기만 한 아빠 밑에서,자기 주관을 가진 당당한 아들이 나오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었겠지요.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목소리 작고 귀가 큰 아빠가 되어 정체성의 연결고리를 끊을까 합니다.
아버님,언제부터인가 아버님은 가끔씩 제 꿈에 나타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방황하는 모습이거나 집을 잃고 나도시는 모습 뿐이었습니다. 아마 제 마음속에 있는 아버님에 대한 생각들로 인해 연결된 모습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제는 저의 마음속에서 아버님에 대한 오해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리고 아버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 훗날 아버님이 계신 그 곳에서 만났을 때 뜨겁게 껴안고 따뜻한 부자의 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편안히 계십시오.
2007년 9월 23일 너무나 못난 아들 호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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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수 07-09-25 06:58